본문 바로가기

그림

어떤 그림을 그릴까

반응형

 

이제 그림이 나의 본업이 아니게 된 지금,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었다. 미술학원 일을 하는 동안 그림은 언제나 목적이 있었고, 학생들의 입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입시에서 먹힐만한, 잘 그린 그림 뿐만아니라, 학생들이 배우기 쉽고 빨리 그릴 수 있는 그림이어야 했다. 재료, 그림의 크기, 한 장을 그리는데 필요한 시간, 주제 등 모든 것은 시험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2절, 3절, 4절 이라는 규격에 맞추어 그리게 되었고, 수년마다 한번씩 바뀌어가는 입시 유형에 맞추어 재료가 변하고, 주제가 변해왔다. 그래도 내가 원하고, 내가 잘 그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그려왔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바닥을 벗어나고 보니 그나물에 그밥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바닥을 벗어나기로 작정을 했을 때부터 계속 미뤄놨던,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 될거라고 생각했던 고민이 두가지 있었다.

1. 앞으로도 그림을 그리게 될까?

2.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이 두가지 질문을 미뤄놨던 이유는, 우선 성공적으로 이 바닥을 벗어나는데에 집중을 해야했다. 9살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해서 대학에 가자마자 강사생활을 시작했고, 벌써 서른 중반을 넘어간만큼 이 바닥에 너무 오래있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최소한 이만큼 벌면서 먹고 살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컸다.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 한 마당에 죽기살기로 준비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앞으로도 그림을 그리게 될까?' 같은 팔자 좋은 고민 따위 할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 이 어려운 고민이 될거라고 생각했던 두가지 질문이 생각보다 쉽게 정리가 되었다.

막상 미술학원에서 벗어나와보니 이제 더 이상 학생들을 가르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림을 그리지 않을것 같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림은 이미 나의 코어 같은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두번째 질문도 생각보다 심플하게 해결되었다.

입시그림이 아니라고 해서 지금부터 당장 내가 굉장히 심오하고 깊이있는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리는 없다. 줄곧 해온 일이 내 그림이라기보다는 학생들이 쉽게 따라할 수 있으면서 시험에서 잘 먹히는 그림이었는데, 갑자기 내가 그런 좋은 작업을 할 수 있을리 없다. 게다가 이제 그림은 내 본업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굉장한 작업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된다. 내가 즐겁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면 되는데, 일단 내가 잘 그릴 수 있는것 부터 그리기로 했다. 종이 사이즈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꿔보고, 특히 입시에서는 필요없는 조명환경의 인물들을 여러장 재미있게 그렸다. 지금은 인물수채화나 소묘를 즐겨하고 있는데 풍경이나 정물도 그려볼 생각이다. 아이패드로 그림도 그려보고 있고, 그림 그린 과정을 유튜브에도 올리고 있다. 학생들을 위한 것도, 취미생을 위한 것도 아닌 정체성이 불분명한 허접한 채널이지만 이 또한 즐거운 과정으로 올리고 있다. 

꼭 잘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그 동안 불필요했던 많은 두려움들을 없애주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