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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세계사 편력 1 (Glimpses of World History 1, 자와할랄 네루,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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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나는 언젠가 한번쯤 세계사를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사실 왜 그래야하는지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역사를 알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거라 막연히 생각했거나 혹은 개인적인 지식의 양을 늘리고 싶은 욕심에 세계사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은 알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사책이라는 것은, 더군다나 '세계사 편력'이라는 제목의 책은 어느정도 딱딱하고 지루한 지식의 나열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어볼 결심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은이 자와할랄 네루의 서문과 딸에게 보내는 첫 편지를 읽으면서 이 책을 대하는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네루는 인도인으로 영국에 의해 불합리하게 통치를 받고 있던 시기의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불합리한 이유로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본인이 알고 있는 세계사에 대한 지식을 딸과 함께 '토론'하기 위해 이 편지들을 썼다. 물론 감옥이라는 환경을 생각하면 '토론'이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이 표현은 지은이가 강압적인 지식의 주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세계의 역사를 청자인 어린 딸의 이해능력을 고려하면서도 시대별로 유동적이면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파악하며 써내려갈수 있을 만큼 지은이는 굉장한 지식인이지만 그는 이것을 절대 뽐내지 않는다. 오히려 일방적일 수 밖에 없는 편지라는 매체의 한계 때문에 딸이 이 편지들을 혹여나 일방적인 훈계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설교가 아니라 토론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쓰는 동안 그의 딸과 평소에 그러했듯 대화와 토론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진보해 왔고 인간이 야만 상태에서 어떻게 문명상태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시대보다 훨씬 교양도 깊고 문명도 뛰어났던 시대가 어떻게 퇴보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면서 지은이가 계속 강조하는 것은 편협된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강대한 서구문명에 의해 침략이 빈번한 시기에 우리는 특정 국가, 종교 또는 인종에 의해 쓰인 역사를 접하기 쉽다. 이렇게 왜곡된 역사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역사를 배움으로써 얻게되는 긍정적 효과는 반감되거나 오히려 더 안좋은 영향을 받게 될 수 있다.
왜곡된 역사의 예로 영국, 프랑스 등에 의해 점령되기 이전의 아메리카대륙도 실제로 얼마나 높은 수준의 문명이 발달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실제로 꽤 높은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던 증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침략이 아니라 야만 상태의 대륙에 문명을 전파하여 발전시킨 것이라고 생각하는 강대국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실은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일 것이다. 또 실제로는 아메리카대륙과 중국대륙에는 전혀 힘이 미치지 못했던 알렉산더 대왕이나 전성기의 로마도 현재 서구 문화의 강력한 영향으로 인해 흔히 세계를 제패했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렇게 특정 세력이나 종교, 인종 등의 시각에서만 바라본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접하게 되면 균형있는 시각을 갖기 어렵게 될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일도 비판적인 사고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물론 너무 비판적인 시각에만 집중하는 것은 피해야한다. 그래서 네루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화와 토론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특히 네루는 얼마든지 본인의 지식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어린 딸에게 쓰는 편지에서도 그것을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대화의 장으로 생각해주길 바랬다. 
우리도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무조건 상대를 비난하고 비판하면서 내 생각을 강요하기보다는 언제나 무엇이 더 옳은 방법인가를 토론하는 자세를 가질 때에 비로소 침체되어있지 않고 현재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모두가 더 나은 방향으로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찬란한 문명을 쌓아올렸던 로마 제국은 그 뒤에도 오래도록 콘스탄티노플에 존속했고, 그 이후에도 1400여 년 동안 온 유럽을 지배했다. 이렇게 1000년 이상에 걸쳐 쌓아올려진 문명도 결국 시들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서유럽에서 막 꽃피고 있던 나라들이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 서서히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쌓아올리게 된다. 어째서 세계는 그렇게 높은 문명과 지성을 이룩해냈으면서도 뒷걸음치기도 하고, 심지어 비참하게 전락해 노예의 나라가 되기도 할까? 왜 눈부신 과거를 가지고 있는 중국이 끝없는 쟁탈전의 대상이 될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네루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지식과 예지는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모든 것을 배워야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균형된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유럽이 암흑시대를 맞이한 원인으로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정식 국교로 받아 들인 이후 서양에서 번영한 공인된 기독교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암흑 시대 내내 학예의 등불을 지켜 온 것은 기독교와 기독교의 수도사들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문명에서 좋은 시대와 나쁜 시대가 있다. 또 세련된 문학과 예술 창조의 시대가 있고, 분열과 쇠퇴의 시대도 있다. 따라서 어느 경지에 오른 문명일수록 긍정적인 변화와 생성을 억압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관용과 실험과 변화를 중심으로 문화의 역행을 방지해야 한다. 이에 대해 네루는 우리는 과거를 때때로 슬쩍 볼 뿐이며, 지식과 경험의 높은 언덕을 또다시 올라가야한다고 했다. 
 인도는 우리와 역사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 여러 개의 작은 국가로 분할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일관되게 민족적 동질감을 유지해왔다. 그리고 지도층과 귀족의 부패 등 내부에서의 붕괴와 여러 번의 침략을 당했던 역사도 있다. 특히 영국에게 통치를 받으며 각종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비참했던 역사를 가진 것도 특히 우리와 비슷하다. 줄곧 우리가 접해왔던 서구의 역사는 유럽 등 현재의 강대국에 의해 그들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에 의해 쓰여진 역사는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게다가 이야기가 너무 긴 호흡으로 진행되거나 연도별로 일어난 사건을 나열해주는 것이 아니라 편지라는 매체의 특성상 이야기가 적당한 길이로 다듬어져 종결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역사라는 것은 쓴 사람의 주관이 개입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만을 모아서 스스로 주관으로 연구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역사에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쏟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세계를 얼마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특히 강자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바라보는 역사가가 쓴 좋은 역사책이 있다면 나같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편리한 일이다. 네루의 편지에서 이야기 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한번에 다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를 왜 공부해야하고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1권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다른 역사가는 또 네루와는 어떻게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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